
건축을 처음 공부할 때 그리스 기둥이나 고딕 첨탑이 그냥 '오래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현대 건물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과거 건축양식이 지금 이 시대의 건물 안에 조용히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서양 건축의 흐름을 짚어보면서 그 연결고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과거양식 — 지금도 통하는 비례와 구조의 언어
혹시 현대 건물 기둥을 보면서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으신가요? 제가 처음 그 느낌을 받았을 때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건축은 주범(柱範, Columnar Order) 체계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주범이란 기둥의 형태와 비례, 세부 장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건축 규범을 말합니다. 도리아식(Doric), 이오니아식(Ionic), 코린트식(Corinthian)으로 나뉘며, 이 구분은 지금도 건축 디자인의 기준 언어로 남아 있습니다.
로마 건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이드(Vault)와 돔(Dome)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여기서 보이드 구조란 아치를 연속으로 연결해 천장을 덮는 방식으로, 기둥 없이도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이었습니다. 판테온(Pantheon)의 돔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세 고딕 건축에서는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라는 독특한 구조가 등장합니다. 플라잉 버트레스란 벽면 바깥에 설치된 아치형 지지대로, 높은 벽체가 받는 하중을 외부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 건물이 옆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외부에서 받쳐주는 구조입니다. 이 덕분에 벽을 얇게 만들고 그 자리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넣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개념을 처음 이해했을 때 단순히 '장식이 화려한 건물'이라고만 봤던 고딕 성당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과거 건축양식의 핵심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대 그리스: 주범 체계 확립, 비례와 균형 중시
- 고대 로마: 아치·돔·보이드 구조로 대규모 건축 실현
- 중세 고딕: 플라잉 버트레스로 수직성 극대화, 종교적 상징 강조
- 르네상스: 인간 중심의 비례 회복, 고전 양식 재해석
현대건축 — 장식을 버린 자리에 무엇이 남았을까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이 등장했을 때, 건축계의 반응은 엇갈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불필요한 장식에서 해방됐다"는 환호와 "너무 차갑고 인간미가 없다"는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으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모더니즘 건물이 그냥 단순한 사각형 덩어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순함에도 논리가 있었습니다.
모더니즘(Modernism) 건축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원칙 아래 불필요한 장식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여기서 모더니즘이란 20세기 초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건축 사조로, 철근 콘크리트(Reinforced Concrete)와 철강, 유리 같은 신소재를 활용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운 구조 설계를 가능하게 만든 운동입니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같은 건축가들이 이 흐름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흐름이 마냥 진보적이지만은 않았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기능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사람들이 "건물이 너무 인간미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반작용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등장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의 엄격한 기능주의에 반발해 역사적 요소, 유머, 상징성을 다시 건축에 도입한 흐름으로, 1970~80년대를 중심으로 크게 번졌습니다.
최근에는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 개념이 현대건축의 핵심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패시브 하우스란 단열, 기밀성, 환기 시스템을 최적화해 외부 에너지 공급 없이도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하는 건축 방식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신축 건물의 상당수가 이 기준을 충족하도록 설계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모든 신축 건물을 '제로에너지 건물(Zero Energy Building)'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출처: 유럽연합 공식 홈페이지).
전통과 현대의 조화 — 과거를 살리면서 현재를 담는 방법
건축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닐까요. 오래된 건물을 어떻게 지금 시대에 맞게 쓸 수 있을까? 부수고 새로 짓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그게 항상 맞는 답은 아닙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는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의 그레이트 코트(Great Court)였습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내부에 현대적인 유리 돔을 얹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낸 사례입니다.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설계한 이 유리 지붕은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계산된 2,656개의 서로 다른 유리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저를 꽤 오래 멈추게 했습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의 유리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9년 건축가 I. M. 페이(I. M. Pei)가 설계한 이 피라미드는 처음 공개됐을 때 "역사적 건물을 훼손한다"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지금은 루브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겉모양을 섞는 것이 아닙니다. 리노베이션(Renovation), 즉 기존 건축물의 외관과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내부 구조와 설비를 현대화하는 방식이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세계유산 건축물의 보존과 현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가이드라인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으며, 역사 건축물의 지속 가능한 활용이 문화유산 보존의 핵심 과제로 강조되고 있습니다(출처: UNESCO 세계유산 공식 사이트).
결국 전통과 현대의 조화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더 잘 보이게 해주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기둥 하나, 창문 하나가 이제는 다르게 보입니다. 그 안에 어떤 시대의 고민이 담겨 있는지, 어떤 기술이 숨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앞으로 건물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외형만 보지 말고 그 건물이 어떤 양식을 계승했는지, 어떤 현대 기술이 접목됐는지를 한번 따져보시길 권합니다. 건축이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